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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Story] 머리카락처럼 뭉쳐서 제거한다...혈전 치료의 혁신
<KISTI의 과학향기> 제3171호 2025년 08월 04일"머리카락을 손으로 굴려 뭉치듯 혈전도 압축해서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평소처럼 샤워를 하던 미국 스탠퍼드대 기계공학과 자오 루이커(Ruike Zhao) 교수는 문득 배수구에 걸린 머리카락 뭉치를 보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기발한 발상에서 시작된 연구는 혈전을 훨씬 더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심장마비와 뇌졸중 등 치명적인 심혈관성 질환들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의료기기 ‘미세 회전장치(Milli-spinner)’는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날 혈전 제거술의 한계
연구진은 최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새로운 혈전 제거 기술을 발표했다. 바로 혈전을 이루는 섬유소(피브린) 단백질을 뭉치고 압축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혈전은 실처럼 생긴 피브린 단백질이 그물처럼 적혈구를 붙잡아 끈적한 덩어리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혈전은 혈관을 막아 급성 허혈성 뇌졸중, 폐색전증, 심근경색, 심부 정맥혈전증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가령 혈전이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을 차단해 뇌졸중을 유발할 경우 의사들은 1분 1초를 다퉈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혈전을 제거해야 최대한 많은 뇌세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혈전을 성공적으로 제거하는 비율은 50%에 불과하다.
오늘날 기계적 혈전 제거술은 막힌 혈관을 뚫기 위해 흡입, 스텐트 회수, 절단 등의 방식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크거나 단단한 혈전, 특히 섬유소 성분이 많은 혈전의 경우 효과가 제한적이다. 또 혈전을 무리하게 제거하려다 혈전이 파편화되어 더 작은 혈관을 막는 원위부(신체 말단부) 색전증을 유발할 위험도 있다.
머리카락 뭉치듯 혈전 섬유소 95% 압축
연구진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안했다. 바로 혈전의 주요 구성 성분 중인 ‘피브린’에 주목한 것이다. 피브린은 혈액 응고 과정에서 섬유망을 형성하여 혈구를 붙잡아 혈전을 만든다. 연구팀은 회전 장치로 혈전에 압축력과 전단력을 가할 때 피브린이 더욱 조밀해지고, 적혈구는 혈전으로부터 빠져나가면서 혈전의 부피가 크게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뭉치면 부피가 줄어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자오 교수는 의료용 초소형 로봇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로봇의 회전 구동력이 혈관에 국소적인 흡입력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초소형 로봇을 혈전 제거 기술로 발전시켜 미세 회전 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를 혈관에서 사용할 경우 압축과 전단력이 작용해 피브린을 뭉쳐 빨아들일 수 있다. 시렞로 연구팀은 미세 회전 장치를 돼지 및 실제 혈관과 유사한 환경에서 실험을 진행한 결과, 기존 흡인 혈전 절제술보다 혈전을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미세 회전 장치는 단단한 혈전을 제거할 때도 첫 시도 성공률 90%라는 획기적인 결과를 보였다. 기존 기술로 단단한 혈전을 제거할 때 첫 시도 성공률이 평균 11%에 불과한 점을 고려했을 때,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미세 회전 장치는 혈전을 파편화하지 않고 온전히 압축해 제거함으로써 원위부 색전증의 위험을 크게 줄인다. 즉 혈관을 막힘없이 깨끗하게 재개통하는 재혈관화를 가능케 한다.
뇌졸중, 심근경색, 말초혈관 질환 치료의 새로운 희망
이번 연구 결과는 의학 분야, 특히 혈관 질환 치료에 혁신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뇌졸중, 심근경색, 폐색전증, 말초혈관 질환 등 혈전이 일으키는 다양한 질환의 치료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현재 뇌졸중 치료를 중심으로 미세 회전 장치의 임상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신장 결석 제거 등 다른 의료 분야에도 활용할 계획이다. 자오 교수는 “우선 혈전 치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잠재적 용도는 더 많다”며 “현재 미세 회전 장치의 국소 흡입 기능을 사용해 신장의 결석 조각을 포획하고 제거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기술로 혈전 제거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샤워 중 떠오른 기발한 아이디어가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수많은 생명을 구할 희망의 불씨가 될 전망이다.
글 : 강현주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유진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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