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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Story] 아름다운 자연 풍경, 고통을 ‘진짜로’ 덜어준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191호 2025년 11월 03일50년도 더 된 일이다. 1971년 환경 심리학자 로저 울리히 박사는 미국 펜실바니아주 한 병원에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관찰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창밖으로 울창한 나무가 보이는 쪽에 있던 환자들이 딱딱한 벽돌 담장만 보이는 쪽 환자들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들은 24시간 정도 먼저 퇴원했다. 진통제도 덜 찾고, 간호사들의 간호 기록에도 보다 긍정적인 상태로 묘사됐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렸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위안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작용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막연히 자연이 건강에 좋다고 여기지만, 이 믿음의 근거는 불확실하다.
사진 1. 1971년 미국 펜실바니아주 한 병원에서 자연 풍경을 접한 환자일수록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이 관찰됐다. 다만,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내진 못했다. ⓒshutterstock
그러다 최근 영국 엑서터대학교와 오스트리아 빈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뇌 과학 기술을 활용해 이 질문의 실마리를 찾았다. 자연이 뇌의 통증 처리 방식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도시보다 숲을 볼 때, 뇌의 반응이 달라졌다
연구진은 자연에 대한 노출이 통증을 줄이는 원리를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49명의 건강한 성인에게 가상현실(VR) 기기를 주고 가상 현실 속 자연, 도시, 사무실 등 실내 환경을 담은 영상을 보게 했다. 각 영상은 호숫가 물결 소리나 도시의 교통 소음 등이 함께 송출해 몰입감을 높였다.
사진 2. 연구진은 통증에 반응하는 뇌 영역을 fMRI로 관찰했다. ⓒnature communication
실험 참가자들이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장비에 누워영상을 보는 동안, 연구진은 이들의 왼손 손등에 미세한 전기 충격을 가했다. fMRI는 뇌의 혈류 변화를 감지해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각각의 환경에서 통증을 느낄 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도시나 실내 환경 영상을 볼 때보다 자연 영상을 볼 때 통증의 '강도'와 '불쾌감'이 모두 더 낮았다고 응답했다. 특히 통증의 ‘불쾌감’ 평가에서 차이가 더 컸다. 그런데 실제로 뇌를 스캔한 데이터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자연은 통증 신호 실제로 줄여준다
우리의 뇌는 통증을 두 단계에 걸쳐 처리한다. 먼저 통증 자극을 신경계가 처음으로 감지해 전달하는 ‘낮은 수준’의 통증 처리가 있다. 이는 몸이 보내는 날것 그대로의 위험 신호로, 마치 연기를 감지해 울리는 화재경보기와 같다. 그다음 단계인 ‘높은 수준’의 통증 처리는 경보를 듣고 패닉에 빠지는 사람의 반응처럼, 통증을 인지하고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이다.
연구진은 자연환경이 이 두 단계 중 어느 부분에 작용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 가지 지표를 활용했다. 낮은 수준의 통증 처리를 측정하기 위해 ‘신경학적 통증 신호(NPS)’를 그리고 높은 수준의 통증 처리를 측정하기 위해 ‘자극 강도 독립적 통증 신호-1(SIIPS-1)’을 사용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은 자연 영상을 볼 때 NPS가 뚜렷하게 감소했으나, SIIPS-1은 유의미한 변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만약 자연을 볼 때 통증이 줄어드는 것이 단순히 ‘플라시보 효과’였다면 SIIPS-1에서 변화가 나타났어야 한다. 즉, 자연이 통증을 완화하는 원리가 통증 신호 자체를 약화시킨 것임을 시사한다. 한 마디로 단순한 믿음이 아닌, 감각 처리 단계에서 벌어지는 신경학적 현상이라는 의미다.
이는 54년 전 울리히 박사가 관찰 현상에 대한 현대 뇌 과학의 대답이다. 창밖의 나무는 단지 환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뇌 속의 통증 신호를 실제로 줄여준 것이다. 논문 제1저자인 맥시밀리안 슈타이닝거 연구원은 “이 연구는 울리하 박사가 관찰한 것이 막연히 자연이 건강에 좋다는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 통증 정보에 뇌가 덜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자연이 우리 주의력을 지켜 준다
그렇다면 자연환은 왜 우리 뇌의 통증 스위치를 낮춰줄까? 연구진은 그 이유를 ‘주의력 회복 이론(ART)’에 있다고 한다고 본다. ART는 자연이 사람의 ‘주의’를 고통에서 돌려놓아 자연스럽게 통증 신호를 낮춘다고 설명한다.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잔잔한 물결 같은 자연 풍경은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우리의 주위를 자연스럽게 돌려놓는다. 반면 도시의 광고판이나 사이렌은 주의력을 강제로 빼앗아 정신을 지치게 한다.
한편, ‘스트레스 회복 이론(SRT)’은 자연 풍경이 긍정적인 정서 반응을 끌어내 스트레스 회복을 돕는다고 본다. 즉, 자연을 볼 때 감정적 안정을 통해 높은 수준의 통증 처리를 돕는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통증 완화가 감정 변화가 아닌, 감각 단계에서 실제 신경 반응 때문이라는 점을 보였다. 결국 자연 풍경은 마음의 위안만이 아니라 통증 신호를 낮추는 생리적 효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통증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
이번 연구는 자연에 대한 노출이 단순히 주관적 느낌을 넘어, 실제 뇌 활동의 변화를 통해 통증을 완화한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는 환자들의 통증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특히 VR 활용 가능성을 제시한 점이 눈에 띈다. 실제 자연 풍경 대신 영상, 즉 가상 자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진통 효과를 얻을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몸을 움직이기 힘든 환자나 도심에 살아 자연을 접하기 어려운 사람도 VR 등을 통해 통증을 관리하는 가능성을 연 셈이다. 즉, VR 기기가 수술 후 회복실의 필수 장비가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오지나 선박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사람이나 우주정거장에서 지내는 우주인 등 자연과 격리된 환경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건강 개선에도 활용이 기대된다.
또 약물 없이 통증을 완화해 환자의 고통을 경감하고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비약물 치료의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인구 고령화로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만성 통증으로 인한 직접 의료비, 정신적 고통, 노동 생산성 감소로 인한 비용 등을 고려하면 통증의 사회적 비용은 계속 커질 전망이다. 비약물 통증 요법은 이 같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쓰일지 모른다.
엑스터대 알렉스 스멀리 박사는 “가상 자연 노출로도 통증 완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비약물 치료에 중요하고 실질적 의미가 있다”며 “이 연구는 자연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열어 준다”고 말했다.
글 : 한세희 과학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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