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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Story] ‘잠에 곯아떨어진다’는 말, 비유가 아니었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038호 2026년 03월 30일한국에서는 깊이 잠든 상태를 두고 “잠에 곯아떨어졌다”고 표현한다. 영어권에서도 “fall asleep(직역하면 ‘잠에 떨어진다’)”이라는 말을 쓴다. 서로 다른 언어지만 공통적으로 ‘떨어진다’는 표현이 들어간다. 아마도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의식이 흐릿해지다 어느 순간 기억이 끊기는 이 경험을 서서히 이어지는 변화라기보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듯 급격히 바뀌는 상태로 느꼈던 것 같다. 실제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직관적인 표현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꽤 정확하게 짚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1. 사람들은 잠에 떨어진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사람들이 수면 상태를 급격한 변화로 인식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Shutterstock
뇌는 서서히 잠들지 않는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팀은 사람이 잠에 드는 순간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분석해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Nature Neuroscienc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1,000명 이상의 뇌파 데이터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분석한 결과 뇌는 서서히 잠에 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상태가 급격히 바뀌는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잠들기 직전에 나타나는 뇌 상태의 변화를 활용하면 사람이 언제 잠에 들지 초 단위로 예측할 수 있음도 입증했다.
사진 2. 연구진들은 사람들의 뇌파 데이터를 측정한 후, 독자적인 방식으로 분석했다. ⓒImperial College London
연구팀은 먼저 뇌의 상태를 정확하게 추적하기 위해 새로운 분석 방법을 고안했다. 뇌파는 수많은 신경세포가 뿜어낸 신호가 섞여 있는 복잡한 데이터다. 어떤 신호는 빠르게 진동하고, 어떤 신호는 느리게 움직이며, 또 어떤 신호는 서로 다른 뇌 영역과 긴밀하게 연결돼 함께 변하기도 한다. 연구팀은 이런 다양한 정보를 동시에 고려하면서도 한 번에 표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파수 세기, 신호의 규칙성, 뇌 영역 간 연결성 같은 여러 특징을 뽑아내고, 그 값을 이용해 공간 속 한 점의 위치로 표시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물의 위치를 점으로 표현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의 위치를 설명할 때 왼쪽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x), 앞쪽으로 얼마나 나가 있는지(y), 위로 얼마나 올라가 있는지(z)를 한데 모아 (x, y, z)로 나타내고, 이를 3차원 공간 속 한 점에 대응시킬 수 있다. 연구팀은 이 같은 방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뇌의 상태를 ‘공간 속 위치’로 바꿔 표현했다.
이렇게 각 순간의 뇌 상태를 점으로 나타낸 뒤 그 점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면 하나의 이동 경로가 만들어진다. 이 경로를 분석한 결과, 깨어 있을 때 뇌 상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다가 잠에 가까워질수록 점의 움직임이 불규칙해지고 흔들림이 점점 커지는 특징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 구간을 지나면 이 흐름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며 마치 급커브 경로를 만난 것처럼 전혀 다른 영역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수면 상태로 전환됐다. 즉, 뇌는 천천히 잠에 드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흐름을 따라 움직이다가 특정 구간을 지나면서 ‘떨어지듯’ 상태가 바뀌는 패턴을 보인 것이다.
연구팀은 이렇게 전환되기 직전의 흔들리는 특징을 이용해 사람이 언제 잠에 들지를 예측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뇌 상태는 잠에 가까워질수록 움직임이 느려지고 작은 변화에도 크게 흔들리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 패턴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뇌 상태의 이동 경로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면서 이 신호가 나타나는 시점을 포착했고, 실제로 피험자가 잠들기 몇 분 전부터 일정한 변화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수면 진입 시점을 초 단위로 예측했을 때 평균 정확도가 95%를 웃돌았다. 겉으로는 아직 깨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뇌는 이미 ‘곧 잠에 들어간다’는 신호를 분명하게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잠드는 순간, 예측할 수 있다!
이번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어 운전 중 졸음운전을 예방하는 시스템에 적용하면 운전자가 실제로 잠에 들기 몇 분 전부터 나타나는 뇌 상태의 변화를 감지해 미리 경고할 수 있다. 또 불면증이나 기면증 같은 수면 장애를 진단할 때도 잠이 드는 시점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뇌파의 특정 패턴이 나타나는지를 기준으로 수면 단계를 나눴다면 앞으로는 뇌 상태가 어떻게 이동하고 언제 급격히 바뀌는지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연구는 우리가 잠드는 방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준다. 우리는 보통 잠이 서서히 찾아온다고 느끼지만, 실제 뇌의 상태는 일정한 구간까지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다가 특정 시점을 지나며 빠르게 다른 상태로 넘어간다. 즉, 수면은 단순히 점점 졸려지는 과정이 아니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전환이 가속되는 하나의 상태 변화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써 온 '잠에 곯아떨어진다'는 표현은 이런 변화를 직관적으로 포착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식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툭' 끊기는 경험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 뇌가 특정 경계를 넘으며 상태를 바꾸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용어 풀이]
1) 뇌파 : 뇌에서 뇌신경으로 신호가 전달될 때 발생하는 측정 가능한 파동 형태의 신호.
[참고자료]
▶ Falling asleep follows a predictable bifurcation dynamic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3-025-02091-1)
글 : 김우현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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