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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Story] 동물도 술을 즐겨 마신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121호 2024년 12월 23일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불안과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이는 알코올을 섭취할 때 쾌락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생성되면서, 중추신경계의 활동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다만, 알코올이 주는 쾌락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효과인 데다, 과음할 경우 기억 장애, 신경세포 사멸 등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그럼에도 술이 주는 쾌락이 크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술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국만 하더라도 1인당 주류 소비량이 2021년 기준, 7.7L에 달하는데 이는 한 사람이 매일 소주 반 잔(25ml) 분량의 술을 마신 것과 같다.
사진 1.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해치지만, 많은 사람이 술이 주는 쾌락을 느끼기 위해 술을 마신다. ⓒ클립아트코리아
그런데 사실, 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물들도 술을 마실 줄 안다. 실제로 지난 2022년 인도의 한 마을에서는 20여 마리의 코끼리가 사람이 담근 술을 훔쳐 마시고 취한 채 기절하는 일이 발생했고, 올해 10월 브라질에서는 원숭이가 쓰레기통에서 꺼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장면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언뜻 해프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학계에서는 동물들의 음주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연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물이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마시거나 술에 섞인 첨가물의 향에 이끌려 실수로 마신 게 아닌 의식적으로 찾아 마셨다는 것이다. 동물과 알코올에 관한 연구를 조사한 영국 엑서터대학교 공동연구팀은 최근 이 같은 주장을 국제학술지 ‘생태학 및 진화의 추세(Trends in Ecology & Evolution)’를 통해 전했다.
사진 2. 야생동물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종종 목격되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shutterstock
효모, 생존을 위해 알코올을 만들어내다
흔히 술을 빚을 때 당이 포함된 곡물이나 과일 등에 미생물인 효모를 첨가한다. 이때, 효모가 당을 분해하며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에탄올)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자연에서도 흔히 발생한다. 과일, 수액, 꿀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효모와 만나 발효되면서 에탄올이 생성되는 것이다. 열대나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과일이 자연적으로 발효하면서 농도가 0.6~10%인 에탄올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모가 에탄올을 만드는 이유는 박테리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에너지원인 당을 차지하기 위해 독소인 에탄올을 만들어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다. 엑서터대 연구팀에 따르면 이런 효모의 전략은 약 1억 년 전 백악기 시대에 시작됐다. 백악기 당시 속씨식물이 당이 풍부한 과일, 수액, 꿀을 만들어냈고, 효모가 이들을 먹어 치우면서 에탄올을 내뱉었다. 과일과 꿀을 섭취하는 동물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에탄올을 쉽게 섭취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에탄올이 함유된 과일 등을 계속 먹다가 알코올 분해 효소인 알코올탈수소효소(ADH)를 생성하는 유전자까지 갖게 됐다.
다만 동물들이 에탄올을 섭취한 목적은 불분명하다. 에탄올 냄새가 과일 같은 식량의 위치를 알려줬기 때문일 수도, 에탄올 자체를 열량 공급원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농도가 낮은 에탄올로 기생충 예방 같은 약리적 효과를 얻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과음의 부작용을 고려할 때 동물들도 취하고 싶어서 에탄올을 꾸준히 섭취했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사진 3. 효모는 박테리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알코올을 만들어낸다. 자연에서도 당이 풍부한 과일, 수액, 꿀을 먹어 치우며 알코올을 만들어내는데, 동물들이 이를 섭취하면서 알코올 분해 효소를 갖게 됐다. ⓒTrends in Ecology & Evolution
연구팀은 “생태 진화적 관점에서 에탄올은 보기 드문 물질도 아니었고, 동물들이 기피하는 물질도 아니었을 것”이라며 “에탄올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면 자연에서 에탄올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과 동물들이 진화시킨 행동 및 대사 전략의 다양성을 연구해야 한다” 고 말했다.
진화가 만든 음주 본능? 유전자 변이가 만들어 낸 결과물
한편 동물과 알코올에 관한 연구는 ‘술 취한 원숭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은 인간의 알코올 소비가 익은 과일을 통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에탄올을 먹어온 영장류의 과일 섭취 행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으로, 지난 2014년 UC버클리 소속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가 제안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약 1,000만 년 진화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인간, 침팬지, 고릴라의 공통 조상의 알코올탈수소효소 ADH4(영장류의 혀와 식도에 주로 분포)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이다. 공통 조상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000만 년 전 아프리카는 열대우림에서 사바나로 변하고 있었다. 숲이 점점 줄어들자, 공통 조상의 활동무대가 나무에서 지상으로 옮겨갔고, 고온 건조한 환경 때문에 빨리 익어 땅에 떨어진 과일을 자주 먹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ADH4의 변이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5,000만 년 전까지만 해도 영장류의 ADH4는 적은 양의 알코올을 천천히 분해했는데 변이로 인해 알코올 대사 능력이 몇십 배 좋아졌다.
오늘날 현대인의 잦고 지나친 음주는 미량의 에탄올에 이끌렸던 과거가 낳은 부산물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 에탄올과 동고동락한 역사를 되짚어보며 적당한 음주로 행복한 연말연시를 보내는 건 어떨까.
글 : 김우현 과학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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